이제까지 여성들은 '위대한 여성'의 삶에 개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성이 해준 이야기를 '들었다'. 여성에게 교육이 허락된 것은 5천 년 인류 역사에서, 채 1백 년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여성들이 '한 명 이상'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대중 교육이 보급된 이후였다. 오늘날 여성들이 '나혜석'처럼 살기 위해서, 새로운 삶에 대한 동경과 열망이 두려움으로 귀착되지 않기 위해서, 가부장제로부터 그녀를 탈환해 오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언어가 필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똑똑한 여성'은 '특이한 여성'을 의미한다. 남성사회는 여성이 언어를 갖는 것, 똑똑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여성들도 원치 않늗나. 프란츠 파농이 온몸을 떨면서 간파했듯이, 흑인은 백인의 타자이며 동시에 흑인의 타자이다. 여성의 타자 역시 여성이 아니라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가 아닐 것이다. 정치학자 권혁범의 표현대로, "페미니즘의 '페'만 들어도 괜히 기분 나쁘고 후려치고 싶은 감정적 충동을 느끼는 남성들"이나 나를 포함하여 자기 언어를 갖는 것에 대해 스스로 놀라는(자랑스러워서가 아니라 불안해서) 여성들 모두 가부장 사회의 산물이다.
자본이나 국가가 노동운동은 탄압하지만 강단 좌파에 대해서는 너그럽듯이, 대개 지배 세력들은 저항 세력의 '운동'보다는 '~학'이 안전하다고 느끼며 선호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성주의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여성운동'이나 '여성학'이나 모두 지배 세력의 적대감을 피하기 어렵다. 특히,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설명해 주는 여성주의 지식을 갖는 것, 여성의 시각에서 세상과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 여성이 자기 자신을 위해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사회 구성원이 참지 못한다. 근대 미국에서 국민 의무교육이 실시되었을 때도 흑인 노예와 가정주부는 예외였다. 사회는 이들이 교육을 통해 자기 노동의 의미를 깨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알았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언어는 자원과 권력 이동의 전제이며 시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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